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감상과 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80년 5월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시는 분들은

제 글은 읽지 않으시더라도 이 영화든, 인터넷에 있는 자료든 한 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작은 주제별로 나눠 접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좀 아시는 분들이나, 이 영화에 대해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의 제목 '화려한 휴가'는 당시 광주 진압 작전의 실제 작전명이었습니다.

저 작전명을 알게 된 게 고등학교 때였나 그랬는데,

어처구니 없는 네이밍 센스에 경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라크에서 미군이 썼던 '사막의 폭풍'이나 '충격과 공포' 같은 작전명은 상당히 양반이지요.

당시 군부의 행위 자체도 범죄로써 당연히 처벌 받을 일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저 작전명 지은 인간 찾아서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려주고 싶습니다.

80년 5월에 저는 이제 16개월 된 아기였습니다. 기억 같은 게 있을 리 없지요.

하지만 어렸을 때 자료 사진집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 본 적이 있는 게 아니고 여러 번 봤습니다.

제 방 책장에 그 책이 있었거든요.

아마도 성당을 통해서 배포되던 책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아마도 전 뭐라는 짐승이 청와대에 살 시절이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책 가지고 있다가는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시절이었네요.

부모님이 보지 말라는 책 중에 하나였지만 호기심에 몇 번 꺼내 봤습니다.

머리가 뭉개진 사람의 시체, 피로 얼룩진 채 줄줄이 쓰러져 있는 사람들... 그런 기억이 납니다.

또 기억나는 토픽 두 개는 '헬리콥터 기총 소사'와 '납탄 사용'입니다.

당시 군부에서는 '그런 일 없다.'라고 했던 일들로 기억합니다.

사실 그 어렸을 때 '기총 소사'가 뭔지 '납탄'이 왜 국제적으로 금지 돼 있는지 몰랐지요.

납탄은 방탄 조끼도 뚫는다더군요. 저격수들이 특별한 타겟을 노릴 때나 쓴다나 뭐 그런 얘길

주워들은 적이 있고.. 기총 소사는 뭐... 시위대를 상대로 완전히 전쟁을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어렸을 때 본 몇 장의 사진과 단어들...

크면서 알게 된 누구에게나 알려진 80년 광주의 이야기들보다 그 사진과 단어들이

저에게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키워드였습니다.

상영 10분 전 쯤 상영관에 들어갔습니다.

주위의 사람들, 그 뒤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되더군요.

관객들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겠더군요.

첫 번째는 어지간한 영화 보러 가면 항상 주류 관객인 '젋은 커플'

두 번째는... 3, 40대 이상의 부부로 보이는 분들이었습니다.

의외로 많더군요. 젋은 커플들과 함께 관객 전체를 양분했으니... ^^

머리가 허연 아저씨가 혼자 보러 오신 분도 계셨고,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30대 정도의 아주머니와 함께 오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교복 입은 학생들도 좀 보였구요.

그러고보니 저처럼 젊은 남자가 혼자 온 건 못 봤군요... ^^;;;

영화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전체적으로, 특히 초반에는 주인공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웃음을 주는 장면이 많습니다.

중후반의 무겁고 슬픈 내용과 섞이면서 그들이 잃은 즐거운 일상은 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저렇게 재미있게 살던 사람들이, 대통령 한 번 해 보겠다고 맘 먹은 대머리 새끼 하나 때문에

무고하게 죽어가야 했던 그 현실이 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울려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게라도 따라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의 이요원씨 표정도 너무나도 슬퍼 보였습니다.

크레딧의 캐스팅 부분에 '버스 안 아낙' '시민군 25인' 이런 역할 이름들을 보면서

정말로 저렇게 이름 없는 사람들이 광주에서 흘린 피 위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영화는 위에도 썼듯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오케스트라 연주로 깔리면서

'결혼 사진'을 찍는 장면으로 마무리 됩니다.

영화 안에서 사랑을 싹틔우는 김상경씨와 이요원씨의 결혼식입니다.

이요원씨 옆에는 아버지인 안성기씨가 서 있고, 김상경씨의 동생으로 나온 이준기씨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면서 자리를 잡고 결혼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영화 내용의 연장선에 있는 장면은 아니고 가상의 연출입니다.

그 사진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이요원씨를 빼고는 모두 광주에서 죽었으니까요.

하지만, 죽은 이들은 모두 표정이 밝습니다. 아주 즐겁게 웃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요원씨만 그 안에서 표정이 어둡습니다.

슬픈 표정이라기 보다는 그냥 어두운 표정입니다.

하지만 그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습니다.

그 표정을 보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듣고 있자니 정말 눈물이 흐를 것 같았습니다.

따라부르고 싶었지만 정말 그럴 수가 없더군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마지막에 웃고 있던 죽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광주에서 이 나라 민주화의 꿈을 안고 죽어간 분들이 정말 행복한 분들이고,

그 때 살아남아, 혹은 그 이후에 태어나 지금 이 나라를 보고 있는 우리가 불행하지는 않나 싶습니다.

한 때 민주화의 기수로 함께 달리던 두 양반이 어느 순간엔가 갈라서서

한 사람이 노벨 평화상을 받으니 다른 쪽에서는 '노벨상 수준이 떨어진다.'는 식의 발언이나 하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추하게 늙어가는 꼴이나,

독재자의 딸과, 군사 정권 아래서 권력 자본의 한 축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서로 제 잘났다고 진흙탕 개싸움을 벌이고 있는 꼴이나,

군사 정권이 물러난 지 10년이 넘고 민주화가 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더러운 꼴들을

보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에 비해서 희망 속에 돌아가신

80년 광주의 그 분들이 행복하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저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자료 사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삽입한 영상입니다.

유명한 민중 가요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이 곡이

80년 광주와 직접 연관이 있는 노래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위키피디아 '임을 위한 행진곡' 항목 링크)

다시 한 번 그 때 희생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명복을 빕니다.